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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살의 바다


Ryuha


9. 일상 (1)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대에 나는 보통 암기 장을 꺼내들고 실장 몰래 영단어 따위를 외운다. 엊그제 아연이 덕에 학원에 빠진 하루가 특히 큰 타격이었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면서 단어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역시 애리누나는 날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문자 네 번, 전화 두 번 생깠어.” 라고 친절히 가르쳐주는 애리 누나는, “술 한번 안사면 언니한테 삼촌 잘라 버리라고 할 거야.” 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나를 고뇌케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술약속을 하긴 했지만, 지켜질지는 미지수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공부하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하고 애리누나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공부하려고 이 일을 하는 거니까요.”

 “헤에…. 바람직한 청년이야, 참으로.” 하고 애리누나는 비꼬아댄다.

 “그다지 바람직하진 못하다고요, 참으로.”

 “저기, 내가 오늘 무슨 속옷 입었는지 맞춰볼래?”

 “…….” 나는 한숨을 쉬며 단어장을 덮었다.

 “새로 나온 프라다 신상품이라고. 부츠 랑도 세트야. 보여줄까?”

 “저기, 누나.”

 “왜?” 하고 애리누나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진짜 자꾸 그러면 내가 확 덮쳐버릴지도 몰라요. 나도 남자니까.” 하고 가볍게 겁을 준다.

 “바라던 바다!” 누나는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다. 찰랑이는 긴 생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확 뿜어 나온다. “제우스 모텔에 방 잡아놓을까?” 하고 윙크까지 하며 내 공격을 가볍게 받아내는 애리누나.

 “맙소사.” 나는 질색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기사, 젖꼭지가 보일 듯 말 듯하고 엉덩이는 터질 것 같은 홀 복을 입은 아가씨 넷이랑 같이 있으면서 단어장을 꺼내 외우고 있는 내가 미친놈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리누나를 피해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 엊그제 사온 비타500을 꿀꺽꿀꺽 마셨다.


* * *


 퇴근하고 마시다 남은 보드카를 냉동실에 넣어놓고 나는 아침 9시쯤에 집을 나섰다. 12시부터 수업이 있지만 여유 있게 가서 예습, 복습을 하려던 심산이었다.


 하늘은 맑았다.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추워져가서, 나는 요즈음 스쿠터를 몰고 이동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추운날씨와 오토바이는 상극이다. 원수지간이며 스키니진과 힙합 후드점퍼마냥 언발란스한 커플이다. 온몸을 겹겹이 감싸고 달려도 10분이 지나면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든다. 입김 때문에 헬멧에 성에가 뿌옇게 차고, 겨울이 되면 미끄러운 빙판길에 노래를 부르며 디질랜드에 즐거이 입성할 뻔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젠장, 보험은 괜히 들었냐.”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줌머에 시동을 걸었다. 고유가 시대에 비싼 대중교통 요금. 나는 궁시렁궁시렁 거리면서도, 결국 올 겨울 내내 이 녀석과 함께 해야 할 처지인 것이다.


* * *


 “안녕하세요, 선생님.” 학원에 들어오자마자 마주친 내 담당 교사에게 인사를 건넨 뒤, 난 바로 자습실로 향해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책가방을 꺼내어 주섬주섬 책들과 펜들을 챙겨 책상에 올려놓고 아이팟의 볼륨을 조금 높였다. 오늘 공부할 부분은 어디였더라?


 “…….”


 나는 고뇌하고 또 번민하며, 잘 이해되지 않는 꼬부랑글씨들과 친해지기 위해 안간 힘을 다했다. 약간 시간이 흐르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자습실에서 나오려는데, 웬 긴 생머리의 여자가 자습실 책장의 높은 곳에서 책들을 꺼내려고 끙끙대는 것을 보았다.


 “으잇…, 끙끙….”


 나는 오른쪽 어깨에만 비죽이 걸어놓은 가방을 제대로 목에 걸어 두르고, 살짝 까치발을 들어 여자가 빼려하던 책을 꺼내 주었다.


 “앗, 고, 고맙습니다.” 하고 그녀는 조금 놀란 듯 날 쳐다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별 말씀을.”


 나는 아이팟을 끄며 두꺼운 안경을 쓴 이 여자를 뒤로하고, 수업을 듣기 위해 3 강의실로 향했다. 아아, 졸려 죽겠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눈을 좀 붙였으면 좋겠군.


 충혈된 눈을 비벼가면서 난 열심히 두뇌에 기름칠을 했다. 졸려서 미치겠다. 난 펜 뚜껑을 닫아 관자놀이에 비벼대다가, 몇 번이고 새장 속의 병든 닭 마냥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졸아대기 바빴다. 교사의 목소리는 천상의 자장가요, 삐익- 삑 소리를 내며 화이트보드에 미끄러지는 보드마커의 소리는 환상의 멜로디였다.


 “…….”


 그렇게 얼마를 졸았을까. 뒤쪽에서 무언가 뾰족한 것이 내 옆구리를 살짝 찌르는 느낌이 들어 나는 수마의 유혹에서 벗어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천정에는 무거운 공기가 깔려 있었고, 건조한 형광등 불빛은 내 눈에 불쾌한 입자의 배열을 느끼게 했다. 더불어 옆구리는, 음. 간지럽다.


 “이봐요….” 하고, 날 찌르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아까 그 두꺼운 뿔테 안경의 여자였다.


 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에 얼마 안남은 수업이나마 제대로 받기위해 용을 썼다. 빌어먹을. 이러려면 학원에는 오나 마나라고.


 수업이 끝난 뒤에 점심을 먹을 겸 해서 건물 밖으로 나와 비죽이 입가로 하품을 흘리면서 기지개를 켰다. 학원가인 이 동네에는 주변에 작은 공원들과 음식점들이 종종 있어서, 나는 그 중에 적당한 곳만 골라 혼자서 점심을 먹곤 한다.


 가끔은 자습실 대신에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키고 자습서를 꺼내 들지만, 요새는 새로이 등장한 여고생 패거리들이 하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최근에는 자제하고 있는 편이다. 난 연신 하품을 하다가, 크로스백을 집어 들어 립크림을 가볍게 입술에 발라주었다. 날씨가 차가워질수록 입술이 트고 메말라가는 느낌은 최악이다.


 적당히 자란 가로수들을 지나 사거리를 따라 우회전해 자주 가던 ‘랠리’라는 퓨전 스시 집으로 향하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날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아니겠지, 하면서 고개를 두 번 갸웃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 거기 리바이스 청바지 입으신 분-.”


 리바이스 청바지가 한둘이냐, 하고 중얼거리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뿔테 여자가 한참 뒤에 서 있었다. 참으로 평범해 보인다. 잘 눈에 띄지 않는 스타일 같군. 키는 제법 클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이제야 돌아보시네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미안해요. 음악을 듣고 있어서.” 하고 난 음악이 나오지도 않던 이어폰을 핑계 삼아 가리키며 말했다. “불쾌하셨담 사과할게요.”


 그녀는 어느새 나와 세 걸음 거리 앞까지 다가와 있다. 피부가 참 곱고 탄력 있어 보인다. 뿔테 안경 안의 큰 눈이 매력적이다. 안경 따위 벗어버리면 훨씬 예쁠 텐데.


 “아니예요. 이정도로 뭘. 참, 제 이름은 미희예요. 최 미희. 학원에서 자주 봤었는데 같은 수업을 듣는지는 몰랐지 뭐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예, 반가워요. 제 이름은 은혁이라고 합니다. 강 은혁이요.”

 “이름 멋진데요?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죠?”

 “아, 네. 뭐 그렇긴 한데….” 하고 내가 대답하자마자, 그녀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나를 이끌었다.

 “제가 자주 가는 좋은 곳이 있어요. ‘랠리’도 물론 캘리포니아 롤이 멋진 집이긴 하지만, 절 따라와도 후회는 하지 않을걸요?” 잡은 손을 살짝 놓아주면서 그녀는 말했다.


약간 놀라고 당황스런 마음에 아무 말도 못하고 끌려가다 보니, 나와 그녀는 어느새 어느 허름한 간판의 칼국수 집에 들어와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집 칼국수 맛은 내가 보증 한다고요. 3년이 넘게 먹어왔는걸.” 하고 그녀는 웃으며 새하얀 치아를 보인다.


 난 식탁에 놓여있는 물을 한잔 따라 그녀에게 우선 건네고, 내 것도 마저 따라 입 속으로 들이켰다. 입술이 메마르고 있었다. 립크림을 바른 것이 고작 30분 전인데 말이다.

Posted by 류하